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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 횡성의 역사
전통있는 횡성인의 기상을 정립하는 횡성문화원

조선시대의 횡성

1413년「태종13년」 - 현을 설치함
1414년「태종14년」 - 횡성으로 고쳐 부름
1600년경 - 현감이 강원 중영장를 겸함
1627년「인조5년」 - 현이 철폐되고 동왕14년 현이 복귀됨
- 현 철폐기간 동안 화전 또는 화성으로 부름
1895. 5.26「고종32년」 - 칙령 제98호「1895. 5.26」로 현감이 관할하던 횡성현이 횡성군으로 개칭 군제 실시
- 원주목에서 고모곡,지하곡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서원면을 설치함
1910. 9. 1. - 원주군 서원면을 횡성군에 편입하면서 8개면으로 면제를 실시함

조선시대의 횡성을 기술하기에 앞서, 이때가 지방제도가 제대로 갖추어 지기 시작한 시기인 만큼 강원도사와 함께 기술한다.

강원도의 탄생과 변화

392년 7월 17일 개성(開城)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2년 4개월 후인 1394년 10월 25일 개성에서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궐(宮闕). 종묘(宗廟), 사직(社稷)등 수도를 건설하는 동시에 수도의 명칭을 비롯한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강원도란 지명은 태조(太祖) 3년인 1394년 음력 6월 23일 역사상 처음 생겨났는데, 이는 고려 말 강릉.교주도를 합해서 강원도로 개칭하는 것등 행정구역 명칭변경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가 있었고 약 1년 뒤인 1395년 6월 13일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고 하고, 개성부(開城府)를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로 양광도(陽廣道)를 충청도로 서해도(西海道)를 풍해도(豊海道)로 개칭하는 행정구역 및 명칭 개정이 있었다.
그후 태종(太宗) 13년인 1413년에는 전국을 8도로 구획하였고, 이때부터 세종(世宗)에 이르기까지 8도의 행정구역을 새로운 왕조에 맞게 정리한다.
강원도(고려 때의 교주강릉도에 해당하는 구역)에 속해 있던 영주를 충청도에 할양하고, 가평과 조종(지금 가평에 속함)을 떼어 경기도에 할양했다. 그 대신 경기도에서 이천ㆍ안협ㆍ철원을 강원도에 편입시킨다. 이 작업이 끝난 것은 세종 때이나 원주는 이미 교주강릉도를 강원도로 고칠 때(태종 3년) 강원도에 편성하여 강원도의 감영(監營:지금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그 후 1895년까지 근 500년 동안 강원도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강원도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강릉의 「강(江)」자와 원주의 「원(原)」자를 취하여 강원도라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강릉은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서 정3품관(正三品官)인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두었고, 원주는 원주목(原州牧)으로서 역시 정3품관인 목사(牧使 : 때로는 관찰사가 겸하기도 하였음)를 두어 강원도에서 가장 우대 받은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정종(定宗)ㆍ태종(太宗)ㆍ세종(世宗)대를 거치면서 부분적인 행정조직 개편이 있었는데 정종 원년(元年)인 1399년에는 원주의 속현인 영춘(永春)과 충주(忠州)의 속현인 영월(寧越)을 서로 바꾸었고 태종 13년인 1413년 에는 가평현(加平縣),조종현(朝宗縣:지금 가평군의 일부)을 경기도로 이속하고, 경기도 소속이었던 이천현(伊川縣)을 강원도에 이속시켰다. 또 세종 16년인 1434년에는 경기도 소속이었던 철원(鐵原)지역을 강원도에 이속시켰다.
1395년(태종 13년) 6월 13일 전국을 8도로 나눈 이후 1895년까지 강원도의 행정구역은 거의 변동이 없이 내려가지만 그 이름은 10여 차례의 변경 및 복칭(複稱)이 되풀이 되었다. 그 이유는 강원도는 강릉ㆍ원주, 경상도(慶尙道)는 경주(慶州)ㆍ상주(尙州),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ㆍ나주(羅州) 등 큰 고을이름의 첫글자를 따서 만들었는데, 당시의 제도로는 그 고을에서 역모등 반역자가 났거나 혹은 불효ㆍ패륜 등 도의 및 강상(綱常)에 어긋난 중죄인이 생기면 그 죄인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을의 지방관청의 등급까지 강등시켜 도호부(都護府)나 목(牧)을 군ㆍ현(郡ㆍ縣)으로 강등하거나 군(郡)을 현(縣)으로 강등시키는 한편, 지명에서 그 지역의 이름자를 빼고 다른 고을 이름자를 쓰게 되어 있었다. 도내에서도 춘천ㆍ양양 등의 머릿글자를 넣은 적이 있는데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조선시대 강원도 명칭의 변천

연 대
명 칭
비 고
조선 태조(太祖) 4년(1395) 강원도 강릉/원주
(朝鮮) 현종(顯宗) 7년(1666) 원양도 원주/안양
숙종(肅宗) 1년(1675) 강원도 강릉/원주
숙종 9년(1683) 강양도 강릉/양양
숙종 14년(1688) 강춘도 강릉/춘천
숙종 19년(1693) 강원도 강릉/원주
영조(英祖) 5년(1729) 강춘도 강릉/춘천
1영조 14년(1738) 강원도 강릉/원주
정조(正祖) 6년(1782) 원춘도 원주/춘천
정조 15년(1791) 강원도 강릉/원주
고종(高宗) 32년(1895) 강원/강릉부 -
고종 33년(1896) 강원도 강릉/원주

이것은 국가적 범죄나 도덕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는 고을에 대한 처벌로서 그 처벌기간은 원칙적으로 10년으로, 10년이 경과하면 원래의 이름으로 복귀시켰다.
이 제도로 말미암아 현종(顯宗) 때에 강릉지방에서 열병이 유행하여 박귀남(朴貴男)이란 사람이 병석에 누웠는데 그의 처 난계(難介)와 딸 옥지(玉只)ㆍ연화(蓮花) 등이 나쁜 마음을 먹고 박귀남을 독에 넣어 뒷산에 묻은 적이 있었다. 이 일이 발각되어 강릉은 대도호부(大都護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고 강원도라는 이름에서 강릉의 강자를 빼고 양양을 대신 넣어 양(襄)자를 써서 강원도 대신 원양도(原襄道)라고 불렀다.
또한 숙종(肅宗) 때에는 원주에 남편을 죽인 부인이 있어서 원자를 뺌으로써 강양도(江襄道)라고 했는데, 이 때는 숙종 9년(1683년)~28년(1702)까지 무려 20년간 계속되었다. 또 영조(英祖) 때에는 원주에서 반역을 도모한 사건이 있어서 춘천의 이름을 따서 강춘도(江春道)라 불렀고, 원주는 목(牧)에서 원성현(原城懸)으로 낮추어 불렀다.
다시 정조(正祖)때에는 강릉이 역적으로 몰린 이택징(李澤徵)의 고향이란 이유로 현이 되었고 동시에 정조 6년(1782년)~15년(1791)년까지 10년동안 원천도(原川道)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강원도의 이름이 여러차례 바뀌기는 했지만, 조선의 지방제도는 태조 당시에는 대체로 고려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부분적인 도명의 변경과 중앙이나 지방의 통치기구의 부분적인 개정이 이루어졌을 뿐 대폭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후 정종을 지나서 제3대 태종 때부터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점차 통치규범이 짜여지기 시작하여 여러 방면에서 제도의 개혁과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태종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지방제도를 과감히 개편하여 전국을 8도로 구분하여 지방을 통괄하였다. 세종대(世宗代)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 지면서 세조(世祖)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의 대본(大本)이 되는 법전의 편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성종(成宗) 2년(1471년)에는 정치조직과 지방제도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어 조선왕조 개창 이후 지속된 모든 법제의 개혁과 정비가 1차적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지방제도는 대체적으로 중앙직할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부(漢城府)와 개성부(開城府),경주부(慶州府),전주부(全州府),영흥부(永興府), 평양부(平壤府)의 5개부와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함경ㆍ평안도의 8도제를 시행하였고 그 밑에 하부행정구역으로서 대도호부(大都護府)ㆍ목(牧)ㆍ도호부(都護府)ㆍ군(郡)ㆍ현(縣)제를 시행하였다.
한편 강원감영하의 행정체제를 보면 정3품의 대도호부가 관할하는 강릉대도호부와 정3품의 목사가 관할하는 원주목, 그리고 종3품의 도호부가 관할하는 양양ㆍ삼척ㆍ회양(淮陽)ㆍ춘천.철원의 5개 도호부와 종4품 군수가 관할하는 평해(平海),통천(通川),고성.간성(杆城),영월.정선ㆍ평창의 7개군과 종5품의 현령(縣令)이 관할하는 울진ㆍ흡곡ㆍ금성(金城)의 3개현, 종6품 현감이 관할하는 횡성ㆍ이천(伊川)ㆍ평강(平康)ㆍ금화(金化)ㆍ낭천(狼川)ㆍ홍천ㆍ양구ㆍ인제ㆍ안협(安峽)의 10개 현이 있었다.
이상과 같은 강원도의 지방체제는 부ㆍ목ㆍ군ㆍ현의 강등과 승격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1895년 23부제가 실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강원도란 이름은 없어지고, 강원도는 2개의 부(府) 즉, 영동(嶺東)은 강릉부. 영서(嶺西)는 춘천부로 나뉘었고 부에는 책임자로 관찰부사(觀察府使)를 두었다.
이 때에 원주ㆍ평창ㆍ정선은 충주부(忠州府)에 속하고, 지금의 양평(楊平)인 양근(楊根)과 지평(砥平)을 춘천부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전국을 23부로 나눈 것은 1년 밖에 가지 못하고 1896년 전국을 다시 오늘날과 비슷한 13도로 행정구역을 변경 조정하였고 춘천부와 강릉부를 합쳐 강원도로 다시 바꾸고 양근과 지평도 경기도로 되돌아 갔으며 강원도의 도청소재지도 과거의 원주에서 춘천으로 옮겨 갔다.
한편 각 도의 병마(兵馬)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하나 혹은 둘씩 배치되어 군사를 통괄하고 있었고, 본 도내에는 한 명이 배치되었으며 관찰사가 겸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진란 때에는 절도사 밑에 진관(鎭管)을 설치하였는데, 강원도에는 3곳에 진관을 두고 진관은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통할하였다. 그 세 곳은 원주ㆍ회양(淮陽)ㆍ강릉으로 강릉진관은 영동지방을, 회양진관은 북부지방을, 원주진관은 춘천ㆍ정선ㆍ영월ㆍ평창ㆍ인제ㆍ홍천과 횡성지방을 통할구역으로 하였고, 원주진관은 원주목사(原州牧使)가 첨절제사를 겸임했다.
다시 임진왜란 후에는 도내의 군사적 통할구역을 4개로 나누었다. 영동지방은 종전처럼 하나로 두고, 영서지방은 세 개로 나누었는데, 북부와 중부, 남부로서 철원부사(鐵原府使)가 방어영장(防禦營將)을, 춘천부사가 우영장(右營將)을, 그리고 횡성현감이 중영장(中營將)을 맡았고, 영동지방은 강릉부사가 아닌 별도의 장군을 우영장으로 임명한 때도 있었다.

횡성군의 변화

고려 공양왕 원년(恭讓王 元年)인 1389년 감무(監務)를 설치한 이래 그 소관이 춘천에서 원주로 바뀌었을 뿐, 조선초까지 계속 유지되었으며 고을의 명칭도 고려와 같이 횡천(橫川)으로 계속 불리어 왔다.
횡천에 현을 두게 된 것은 전국을 8도로 나누던 태종(太宗) 13년인 1413년의 일로 종 6품의 현감을 두었고 이듬해인 태종 14년인 1414년 횡천이란 지명이 홍천과 발음이 비슷하여 혼돈을 가져옴으로 고치라는 명에 의하여 횡성(橫城)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 의하면 1454년의 횡성군의 가구는 313호이고 인구는 596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인구상으로 볼 때 도내의 영월군이나 금화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조선시대의 횡성은 임진왜란 때를 제외하고는 평화롭고 조용한 고을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은 후인 인조5년(1627년)에 횡성의 둔내에 살던 이인거(李仁居)가 반란을 일으켜 뜻하지 않은 환란을 맞는다. 이 때는 정묘재란(丁卯胡亂)이 일어났던 해로 왕실에서도 광해군(光海君)을 내 쫓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수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가 안정되지 못한 때라,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이인거는 불평 많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수 백명의 군중을 이루고 스스로 창의 중흥대장(倡義 中興大將)이라 칭하고 횡성현아(橫城縣衙:오늘날 군청)을 습격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강원 중영장을 겸하고 있던 횡성현감은 상당한 무기를 현아에 보관하고 있었는데도 이인거의 무리는 현아를 점령하고 현감 이도남(李櫂男)을 묶어 놓고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한 뒤에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원주로 향하였다. 이 때에 원주목사 홍보(洪寶)가 이끄는 관군과 지금의 원주군 장양리에서 마주쳐 싸움을 벌이고 반군이 대패해 이인거는 정부군(政府軍)에 의하여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며 난은 실패로 끝나고 반군도 해산된다. 이 사건으로 횡성이 처벌을 받게 되니 현이 철폐되고 인조(仁祖) 14년인 1636년까지 10년간 원주목(原州牧)에 합쳐지게 된다. 횡성이 다시 현으로 복귀되는 인조 14년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 났던 해이기도 하다.
한편 영조(英祖) 36년인 1760년에 관에서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각면에 속한 동리는 물론 호구(戶口)와 관문(官門)으로부터 거리 등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횡성현은 현내(縣內)ㆍ남청룡(南靑龍)ㆍ서공근(西公根)ㆍ북청일(北晴日)ㆍ갑천(甲川)ㆍ정곡(井谷)ㆍ둔내(屯內)ㆍ우천(隅川)면등 8개면 55개리이며, 1759년 당시 호수는 2,775호, 인구는 남자 3,078명 여자 3,022명등 6,100명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도서》에 기록된 횡성현의 관할행정구역과 면ㆍ리별 호구를 보면 다음표와 같다.

횡성현의 동ㆍ리와 호구현황

호 수 인 구 수 거 리 비 고
현 내 면
(縣內)
奈 之
25 45 30 동 20리  
玉 洞
19 20 23 북 15리  
永永浦 21 23 25 동 20리  
介 田 45 50 47 동 10리  
馬 山 37 39 38 동 5리  
橋 項 29 31 30 동 5리  
邑 內 168 189 170 동 5리  
소 계 7개리 344 397 363    
남청룡면
(南靑龍)
楸 洞
24 30 28 남 15리  
沙 谷
62 70 64 남 10리  
長 安 51 69 57 남 5리  
靑 龍 54 60 56 남 10리  
茅 坪
42 49 50 남 15리  
葛 豊 37 38 41 남 10리  
소 계 6개리
270 316 296    
서공근면
(西公根)
鶴 谷 57 60 61 서 10리  
草 院 52 55 57 북 20리  
蒼 峯 41 44 45 북 30리  
白鵝谷 45 60 61 북 30리  
內公根
71 80 78 북 40리  
上 同
36 40 41 북 10리  
水 白
68 70 68 북 15리  
葛麻谷 42 47 48    
소 계 8개리
412 456 459    
북청일면
(北晴日)
栗 洞
20 22 21 북 40리  
柳 洞
54 57 56 북 50리  
春 堂
25 30 31 북 60리  
粟 實
30 31 32 북 70리  
兵之坊
21 23 21 북 50리  
外晴日
62 65 61 북 15리  
소 계 6개리 212 228 222    
갑 천 면
(甲川)
中 金
112 120 115 북 30리  
浦 洞
48 50 51 동 40리  
馬 日
48 43 45 동 40리  
檢 垈
34 36 35 동 60리  
甲 川
104 106 112 동 60리  
소 계 5개리 346 355 358    
정 곡 면
(井谷)
山 田
72 76 78 동 30리  
鼎 金
69 70 79 동 40리  
弓 宗
53 57 59 동 40리  
所沙非
45 50 50 동 50리  
池 邱
47 50 51 동 50리  
安 興
64 67 68 동 60리  
大美院
53 60 59 동 30리  
加佐谷
38 40 40 동 25리  
소 계 8개리 442 470 476    
둔 내 면
(屯內)
禾 洞
51 58 59 동 70리  
馬余味
33 40 37 동 55리  
石 門
31 40 35 동 60리  
自浦谷
38 43 40 동 50리  
軍伊谷
40 45 40 동 60리  
右 容
63 70 72 동 55리  
鳥 項
22 30 29 동 50리  
永 浪
101 110 120 동 50리  
都 廳
90 100 95 동 50리  
玄 川
102 110 112 동 55리  
소 계 10개리 571 646 639    
우 천 면
(隅川)
正 庵
33 40 37 동 15리  
法 周
31 39 40 남 30리  
烏 原
24 40 41 동 30리  
水 南
29 39 30 동 20리  
杜 谷
54 61 61 동 20리  
소 계 5개리 178 210 209    
합 계 55개리 2275 3078 3022    

1) 거리는 관문(官門)으로 부터의 거리
2)『여지도서』의 호구는 을유장적(乙酉帳籍)에 의한 것으로 영조 35년인 1759년에 조사 된 것으로 당시 우리나라는 1,654,248호에 인구는 6,796,690명이었다.

한편 횡성현의 관직으로는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與地勝覽)』에는 현감과 훈도(訓導)를 각1명씩 두었다고 나와 있을 뿐 하부조직은 나와 있지 않고, 『여지도서』에는 현감을 무반(武班) 3품을 임명하여 영장ㆍ토포사(營將ㆍ討捕使)를 겸하게 하였고, 현의 관원은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 6명, 아전(衙前) 24명, 지인(知印) 24명, 군졸(軍卒) 30명, 사령(使令) 23명, 관노(官奴) 21명, 기비(妓婢) 5명, 관비(官婢) 12명 등 총 139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지도서』의 내용은 순조(純祖) 26년인 1826년에 편찬된 『횡성읍지』에서 거의 그대로 이어 지고 있으며 면ㆍ리의 구성도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864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횡성현의 행정구역이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는 현내면을 비롯하여 청룡ㆍ우천ㆍ정곡ㆍ둔내ㆍ갑천ㆍ송음(松陰)ㆍ청일ㆍ수남(水南)ㆍ공근등 10개면으로 송음면과 수남면이 늘어나 있다. 또 횡성현의 호구는 3,300호이고 인구는 10,900명이며 군보(軍保)는 2,203명이었고 토지는 한전(旱田)이 192결, 수전(水田)아 179결. 속전(續田)이 290결이었다.
다시 고종 32년(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누던 소위 을미년(乙未年)의 지방행정 개혁은 행정구역상의 큰 변화를 가져온다. 8도를 23부로 나누고 도 밑에 있던 종래의 목ㆍ부ㆍ군ㆍ현을 전부 군으로 통일하여 23부 밑에 336개의 군을 두게 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횡성현도 오늘날과 같은 명칭인 횡성군(橫城郡)으로 되었고 면은 군내(郡內)ㆍ청룡(靑龍)ㆍ우천(隅川)ㆍ정곡(井谷)ㆍ둔내(屯內)ㆍ갑천(甲川)ㆍ청일(晴日)ㆍ공근(公根)면 등 8개면에서 원주목의 관할이었던 고모곡면(古毛谷面)과 지하곡면(地何谷面)을 편입하여 통합하여 고모곡면(오늘날의 서원면)이라 하여 모두 9개 면을 두었다.
그러나 23부로 나눈 행정구역의 개편은 이듬해인 고종 33년, 즉 1896년에 다시 13도로 통합된다. 이때에는 횡성군내에는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치하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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