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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 횡성의 역사
전통있는 횡성인의 기상을 정립하는 횡성문화원

삼국시대의 횡성

235 - 374년경 - 백제의 영역이 됨
413 - 475년경 - 고구려의 영역이 되어 횡천「橫川」, 일명 어사매「於斯買」라 부름
551년경 - 신라의 영역이 됨
통일신라시대 - 삭주「朔州」직할 현으로 황천「潢川」이라함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횡성은 그 소속이 보다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는 삼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보다 넓은 영역을 통솔하게 되고 지방제도가 점차 확립되어 갔기 때문이다.
먼저 백제의 땅이 되었다가 고구려의 영역이 되고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는 삼국간의 영토 확장의 쟁점이 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된다. 백제가 성장하면서 종래의 마한 영역을 대부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점령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성립한 초기부터 횡성지역을 차지하였다고 볼수는 없고 백제가 국가기반을 다지며 대대적인 영토확장을 추진하였던 제8대 고이왕(古爾王) 때인 A.D 235~285년 당시였거나 늦어도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A.D 346~374년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 까닭은 백제가 국가체제를 이룬 것은 고이왕 때이니 빠르면 이 당시에 횡성까지 영토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늦어도 근초고왕 때는 백제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이때가 백제의 전성기로 삼국 중 가장 우세하였던 때이며 적어도 강원도 영서지방의 대부분을 백제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백제시대를 지나서 고구려(高句麗)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A.D 413~491) 때의 일로서 서기 475년 이후가 된다. 이 해에 장수왕은 백제의 위례성(尉禮城 : 지금의 경기도 광주)을 공략하여 백제의 개로왕(蓋鹵王:455~475)왕을 죽이고 백제를 남쪽 웅진(熊津:지금의 충청도 공주)으로 쫓아냈던 것이다.

이어 신라(新羅)의 통치하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시기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뒤처져 있던 신라가 국력을 신장하여 대대적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제24대 진흥왕(眞興王A.D 540~576) 때인 서기 551년경이 된다.

백제가 횡성지역을 차지하였을 당시는 완전한 지방지배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潢川縣 : 本高句麗 橫川縣 景德王改名 今復古(황천현 : 본래 고구려의 횡천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가 지금 다시 옛 이름으로 복구하였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백제 다음으로 이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의 본래 지명이 전할 뿐 백제의 지방행정상 명칭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횡성이라는 명칭의 연원이 되는 「횡천」은 고구려시대부터 불리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횡성이라는 지명의 연원이 되는 「횡천(橫川)」이라는 지명은 본래의 고구려의 명칭이라고 하는데 횡천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은 다른 지역의 하천은 대부분 물이 북-남으로 흐르는데 반하여, 이곳은 동-서, 즉 가로(橫)로 빗겨 흐르기 때문에 가로횡(橫갈)자와 내(川)자를 써서 횡천(橫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기록을 보면 「황천(潢川)」, 혹은 「어사매(於斯買)」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사매」라는 말은 이두식(吏頭式)표현으로 본래 우리고유 명칭을 한자를 빌어 옮겨 놓은 것이 분명하고 횡천(橫川)이나 황천(潢川)보다는 오래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횡성의 별호(別號)를 「화전(花田) 또는 화성(花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횡성댐 건설로 지금은 수몰된 갑천면 화전리(花田里), 부동리(釜洞里)일대가 현의 중심지인 관아(官衙)터였다고 하는 설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일대에는 향교터, 옥장(獄檣)터 화성들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서 그와 같은 설을 뒷받침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횡성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횡성을 비롯한 도내의 영서지방은 삭주(朔州)라 불렸고 특히 원주(原州)는 북원경(北原京)이라하여 5소경 중의 하나로 독립되어 있었다.
9주 중의 하나인 삭주는 북쪽으로 지금의 함경도 안변(安邊)에서 강원도 영서지방과 경상북도 영주(榮州)에까지 이르는 오늘날의 도(道)와 같이 행정구역으로서 道知事격인 도독(都督) 혹은 총관(摠管)이라는 지방장관을 두어 다스렸는데 이때 삭주의 도독 소재지는 춘천(春川)이었다.
당시 지방제도는 주(州) 아래에 군(郡)을 두고, 그 아래 다시 현(縣)을 두었으나 특정지역은 현이라고 하더라도 군에 편입되지 않고 주에 소속되었는데 횡성도 주의 도독이 직할하는 현의 하나였다.
횡성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A.D757년))에 황천현(潢川縣)이라고 개칭하고 삭주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말에 이르러 북원(원주)에 웅거하고 있던 양길(梁吉)의 세력하에 있다가 그의 휘하에 있던 궁예가 세력을 떨치면서 그가 세운 후고구려(後高句麗), 즉 태봉국(泰封國)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후 궁예가 신하들에 의해 추방당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횡성은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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