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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 횡성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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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한상열 의병장 유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2.21
조회수 842 등록 IP 14.54.x.139
한상열 의병장 유적
1876년 4월 2일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에서 부농 ( 富農 ) 의 아들로 태어나 최인순 , 강도영 등과 함께 약 400 ∼ 5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8월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지에서 무려 500여회에 걸친 일본군과의 대전에서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에는 홍천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격퇴시켰다. 심기가 상한 횡성의 일본군 수비대는 4월 2일 홍천군 월운면 서북후동에 거주하는 선생의 처자를 납치해다 놓고 선생에게 귀순하라고 유인, 협박등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그는 끝내 굴하지 않고 4월 20일 횡성읍을 습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병력을 대거 증강하고 소위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자 각 의진이 해산 내지 패산되는 상황을 맞이 하였다. 그는 더 이상 국내에서는 항일 투쟁이 곤란함을 느끼고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결합하고 ‘대한의용부 ( 大韓義勇府 )’에 가담하여 참모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1926년 2월에는 ‘대한독립단’ 참모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 및 몰락을 야기시켰던 주중청년연맹 공산당원들의 흉탄에 안타깝게 51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시신은 만주 길림성 훈춘현 산채강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아직도 독립된 조국에 돌아와 묻히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하였다. 추모비는 1993년 6월 26일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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