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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 횡성의 문화재
전통있는 횡성인의 기상을 정립하는 횡성문화원
문화유산
최양옥지사 공적비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2.21
조회수 850 등록 IP 14.54.x.139
최양옥지사 공적비
자는 길준(吉俊)이고, 호는 추강(秋岡)이다.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갑천면(甲川面) 화전리(花田里)에서 1893년 출생하고 1913년 4월 원주보통학교(原州普通學敎)에 입학하여 1917년 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3월에 서울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과 항일사상이 투철한 그는 독립투쟁에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가서 동지를 규합한 뒤 천도교인(天道敎人)들과 합세하여 4월1일 횡성읍 장날에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그는 일경(日警)의 추적을 피하여 갖은 고생을 겪다가 상경한 후 만주(滿洲)에서 이동녕(李東寧), 박은식(朴殷植)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지령을 받고 서울에 와서 표면상으로 만주농림 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창립하던 신덕영(申德永)을 만나 1920년 7월 서울 소격동(昭格洞) 신덕영의 집에서 신덕영, 노형규(盧衡奎) 등과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였고, 농림주식회사의 주식 모집원으로 가장하고 전남 각지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었다.
그는 다시 신덕영 노기준(盧基準)과 같이 전남(全南) 담양군(潭陽郡) 및 곡성군(谷城群)에서 군자금모집에 진력하던 중 1920년 11월 5일 노기준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광주(光州)로 가던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1년 5월 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의 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 출감하였다. 출감한 뒤 고향을 찾아가니 부친은 이미 4개월 전에 별세하였고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 형편은 말할 수 없었으나, 새롭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각오를 하고 다시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에서 안창남(安昌男), 이용화(李容華), 김정련(金正連) 등 여러 동지와 더불어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한 후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7년 안창남, 신덕영, 김정련 등과 북만주(北滿州)에서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飛行學校)설립을 계획하고 그 기금 모금과 서울에 공명단 지부를 설치하고자 김정련, 이선구(李善九) 등과 같이 1929년 4월 서울에 잠입하였다.
첫 번째 행동으로 4월 20일 그는 김정련, 이선구와 함께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에서 강원도 춘천(春川)으로 가는 일본 우편물 수송차를 권총으로 습격하여 정차시켰다. 이때 일행은 차속에 실었던 우편낭을 뒤져 많은 돈을 빼앗은 뒤 일인의 우편물은 전부 불태워 버리고 동포의 우편물만 남겨 두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자동차를 모조리 정지시킨 후 운전수와 승객들의 눈을 가리고 산골 속으로 끌고 가서 열좌시키니 그 수효 70여명이었다.
이같이 산 밖으로 정보가 새지 않게 한 후 지사의 일행은 행장을 수습하고 강원도 쪽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급보를 받은 일경은 경기(京畿), 황해(黃海), 강원(江原), 충북(忠北), 충남(忠南) 등 5도의 일경과 일본군(日本軍) 제 19사단의 응원을 얻어 천마산(天摩山, 楊州)을 포위하매 지사의 일행은 이를 상대로 전투를 시작하여 망우리고개와 마치고개를 넘나들면서 1주야를 악전고투하였으나 탄환은 떨어지고 세궁진력하여 결국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경기지방법원에서 1년간의 예심을 거쳐 징역 10년의 언도를 받았으며, 심정련은 징역 9년, 이선구는 징역 6년의 언도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이선구는 옥중에서 병사하고 그는 10년이란 긴 세월을 복역하다가 만기 출옥하였다. 1945년 8·15 광복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인천형무소장에 승진되어 근무하였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1983년 5월 4일 노환으로 사망 (갑천면 전촌리 산 164번지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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